<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너무 재밌게 봐서 그런지 기대를 좀 했다. 그런데도 기대 이상이었다.
2023.11.14 - [취미/영화]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네이버 시리즈온 후기
'인간 사이의 단절'을 그린 영화라는 것과 시놉시스만 보고 영화를 봤는데, 보는 내내 '소통의 부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소통하는 관계가 '미나토'와 '요리'인 것 같다. '사오리'는 엄마인데도 '미나토'의 언어를 모른다. '호리'는 여자친구뿐만 아니라 반 아이들과 깊이 소통하지 못한다. 모든 관계가 그저 피상적인, 표면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실존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한다. 그렇게 '괴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완전 오산이었다. 아이들 특유의 천진난만함, 순수함을 강조한 영화는 별로지만, 이렇게 아이들의 언어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정체성까지 다룬 영화는... 대단히 마음에 든다.
보면서 '금쪽이'가 떠올랐다. 내가 '금쪽 상담소'를 보면서 느낀 건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상 행동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만 해도 왜 '미나토'가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지, 왜 교직원들은 '사오리'에게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지 너무 답답했다.
남들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까 봐요.
버려진 버스에서 '미나토'와 '요리'의 이상한 기류.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소수자로서 낙인이 찍히는 것. 100명의 공통점을 찾는 게 빠를까, 2명의 공통점을 찾는 게 빠를까? 2명의 공통점을 100명이 속히 단정 지어 버리면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몇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고 하지 않아.
행복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거야.
어떻게 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우디 앨런 영화처럼 주제가 명확한 느낌이 있다. 오히려 그렇게 쿡 찔러주면서 정작 결말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된 거야?
다만 나무위키를 보니, 누구보다도 비인간적이었던 교장이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점에서 교육자의 위선이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교장은 자기가 운전을 한 건가? 대사처럼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건가? 사실 가장 섬칫한 인물이다. 다들 자기 속의 '괴물'을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사실 '요리'의 아버지도 자신의 괴물 같은 면을 숨기기 위해 '요리'를 괴물로 세뇌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교장 덕분에 '미나토'가 트럼펫에 자신의 괴물을 뱉어낼 수 있었다.
영화의 구조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사오리'의 시점으로 피상적인 얼개만 보여주다가, 두 번째로 '호리'의 시점을, 세 번째로 '미나토'의 시점을 보여준다. 흐름을 쭉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속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이 자꾸 바뀐다. 하지만 아무도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이때까지 본 퀴어 소재 영화 중에서는 단연 최고였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보다 더 재미있다.
마침 CGV에서 12월 6일부터 19일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전>을 했다. <어느 가족>,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괴물>. 정말 정말 다 보고 싶은데, 시험 기간이라 엽서 받으려고 하나만 볼 것 같다.
2024.11.13.
한 번 더 봤다. 원래 안 보려고 했는데, 재개봉임에도 많은 관객들이 보는지 현장 증정 이벤트가 꽤 빠른 속도로 마감되었고, 상영관이 많이 열려 있었다. 마침 시간이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두 번 본 것은 <엘리멘탈>인데, 이것은 자막판과 더빙판으로 각각 봤으니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같은 버전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2023.06.28 - [취미/영화] - <엘리멘탈> 후기
이번에는 스토리를 다 알고 있으니, 장면의 연결과 복선에 집중했다. 우선, 위에서 말했듯 시점은 총 세 개인데, 시점이 바뀔 때마다 도시의 야경('호리'의 말로는 그저 전등 필라멘트에 불과하지만)이 나온다. 그리고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세 시점에서의 전개가 끝난 후에는, 교장의 시점을 잠시 비추고, '요리'의 아버지와 교장(괴물로 보이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그러고는 다시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뛰노는 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끝난다.
가장 주목했던 건 '남자답다'는 표현이다. '호리'가 가장 많이 쓰는데,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으므로 으레 말하는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처음 봤을 때는 '호리'가 왜 '미나토'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 의문이었다. 오해를 낳을 행동을 한 건 아이인데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교육자의 관심이 부족했고, 사건의 단면만 본 채 아이들에게 남자다움을 요구한 건, 사과할 일이다. 초반에 '미나토'가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사오리'가 후에 '미나토'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이야기를 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
'사오리'가 주차를 하는 장면도 세 번(인가 그 이상인가?) 정도 나오는데, 한 번은 뒤 구조물에 차를 박는 장면도 나온다. 교장이 자신의 손녀를 치여 죽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나름 섬찟한 장면들.
산사태가 잦아진 후, '요리'와 '미나토'는 폐기차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지금의 삶이다(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여전하다는 것을 통해 확인했을 것이다. 1년 전 처음 봤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퀴어 소재가 강해서, 보면서 놀랐다. 처음에는 '미나토'의 발기(로 추측되는) 장면만 보고 약간 우정과 사랑의 사이를 담았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냥 사랑이다.
나무위키를 보니, '키다'라는 여자아이('미나토'가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고 말했던)가 '요리'와 '미나토'의 사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아직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는 얘기다. 하긴, 1년 후 한 번 더 본 거면 거의 새로 본 거나 마찬가지다. 이 리뷰를 다시 읽으면서 '그때 내가 이런 것을 느꼈구나'를 다시 깨달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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