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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지도> 후기

nerdite 2023. 9. 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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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이 책이 어려워서 그런 건지 읽는 중에 두통을 많이 겪었다.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다 추상적이고 기존에 접해 보지 않았던 내용이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만 독파하고 나니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이 책을 처음 골랐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이례적인' 정보들을 많이 접한 후 혼돈에 도취된 상태이다.
불교에 대한 내용이 나올 줄 몰랐다. 사실 '삶의 의미'라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심오한 문제에 대해 도대체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무슨 내용을 썼는지 감이 안 와서 이 책을 고른 것도 있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전에 밀리의 서재로 2% 정도 읽고서 교리 스터디에서 '팔정도'에 관한 이 책의 내용을 잠깐 얘기한 적이 있었다. 매우 잘한 듯하다. 지금이었다면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좀 더 설명했겠지만 말이다. 
조던 피터슨의 책을 한 번 읽고 싶었다. 유튜브에 널린 게 그의 영상이지만 부수적인 것보단 추상적이고 어렵더라도 근본적인 것을 다룬 것을 접하고 싶었다. 저서 중 이 책이 가장 끌렸다. 생명공학에 대해 점점 구체적으로 배울 수록 추상적인 것에 대한 욕구가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평소 '삶의 의미'나 가치관 등 좀 더 나의 근본적인 무언가를 찾고 싶었고, 1학기 때는 그것을 영화로 채운 것 같다. '어쩌면 삶엔 의미가 있을 지도 몰라'라는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의 포스터 문구가 내 머릿속을 한참 떠다녔다.
여전히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좀 더 명료해졌다. 다만 그게 이 책이 명료해서 그런 건 아니다. 저자가 아는 게 많아서 그런 건지 온갖 철학적/신학적인 장문의 인용들이 가득하다. 읽으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생을 이 연구만 한 사람의 지혜를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접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이동진 평론가의 이 책에 관한 감상을 꼭 듣고 싶다. 종교학 전공자이기도 하고, 영상으로 이 책의 수려한 내용을 반복해서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마 유튜브에 찾아보면 요약 영상이 없진 않을 텐데, 개인적으로 계속 보던 사람 것이 아니면 요약 영상은 왠만하면 안 본다. 편집은 무조건 편집하는 주체의 관점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부수적인 문장 하나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면(특히 영상의 댓글들) 정말 신기하게도 책을 안 읽느니만 못한 상태(지식의 확장은 없으나 지적 우월감은 장착한 상태)가 된다.
내용 외 서론이 길었다. 책을 요약하고 내 감상을 전달하는 행동 자체를 오랜만에 해 봐서 약간 두렵다. 특히나 이렇게 어려운 책을. 하지만 본인의 틀을 깨는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봤으면 좋겠다. 어차피 거의 없을 테니 하는 얘기다. 애초에 도서관에서 이 책 꺼낼 때부터 깨-끗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났던 책은
- 과학 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 미움받을 용기
이다. 하나는 명시적이고, 하나는 그냥 내가 읽었고 최근에 되새겼기 때문에 생각나는 책인 것 같다.
내가 고3때 공부 대신 토마스 쿤의 책을 선택한 건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한 일이다. 쉽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핵심 내용만큼은 머리에서 잊히지 않았고, 작년 '과학사의 이해' 시간에 잘 써먹은 기억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B+을 받았지만.
이 책을 중심으로 말하면 '과학 혁명의 구조'는 기지->이례적 정보로 인한 혼돈->안정 구조의 과학적 일례인 것 같다. 즉 이 책에서는 토마스 쿤의 이론을 좀 더 일반화해서 설명한다.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의 의미가 저 구조를 따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후반부에 변칙을 다룬다는 점에서 책의 구조와 상당히 비슷하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공약 불가능성이 뭐였더라...?
아들러 심리학을 대충이라도 아는 사람(나)이라면 이 책의 후반부에서 '인생은 점의 연속'이라는 문구가 생각이 날 것이다. 미지와 동떨어진 사람은 과거에 지배된 삶을 산다. 그리고 나의 오류 가능성(이는 정상 과학을 믿는 사람의 태도에서도 중요하다)을 인정하고 미지와 싸우려는 영웅적 태도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에게 미움을 받는다 해도 말이다.

용과 싸워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가 피를 봐야할 수도 있다. 중학생 때 고통과 성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발표를 했던 것이 생각나서 소름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쾌감의 원인은 이 책이 나의 기저의 가치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 해도 얻을 수 없는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 생활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본질에 대한 자극을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리 애스터의 영화도 생각난다. 물질 세계를 의례(신화)와 절대적인 존재(신)에 비유한 부분이 그렇다. 이동진 평론가가 언택트톡에서 '인간의 몸을 인물에 동선에 빗댄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일화 차원과 의미 차원을 교차하는 모습이 이 책과 닮았다.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경계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상에 갇혀 사는 사람을 매우매우 경계한다. 사실 이건 나도 그렇다. 저자는 이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
'이데올로기'는 사회 집단에서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집단 정체성과 나를 동일시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것처럼 칼 융은 이러한 집단정신의 가면을 허구라고 본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저자는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이다. 어떤 대상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물리적 특성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 정서가(정서적 가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니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개개인은 집단이 말하는 의미를 답습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맥락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다만 이 책에서 문제로 삼은 것은 우리가 선험적 의미와 경험적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화나 설화에 대해 '지금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대'라고 미개한 생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저자는 신화에 대해 어떤 절차 지식을 하나의 분석 차원으로 본 일화 차원의 지식이라고 설명한다. 미지를 접했을 때 사람들은 양식화된 반응을 보이는데, 미지를 기지로 바꾸는 영웅주의적 구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라는 일화 차원의 지식을 통해 발견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성경이나 이집트 신화, 부처의 이야기를 든다. 

저자는 집단 정체성과 개인 정체성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집단 정체성을 수용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청소년기'이다. 청소년기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미지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첫 걸음을 떼는 시기이다. 먼저 집단 정체성을 수용하고, 성인기가 되면 그 허울에서 벗어나 성숙해져야 한다. 발달한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방향성을 갖는다. 이때 다른 방향성의 잠재력은 상실하게 된다.
또 미지와 무의식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적응하지 못했다면 아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자아의 일부와 적응하지 못한 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부분에 제일 주목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메타인지(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은 후반부에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 영웅주의자가 되라(미지를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워 쟁취하라)
- 성인이라면 집단 정체성에서 벗어나라
-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파악하라
- 선과 대립하는 쌍둥이 형제, 악은 미지가 없다(또는 미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거기에서벗어나라
- 나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라
이 정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건 역시 '자기 이해'의 중요성이다. 그러려면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생각보다는 내 인생과 내가 속한 이 사회에 대한 영웅이 되고자 해야 한다. 나를 미지의 장소에 끊임없이 둬 보는 것이다.
'나를 이해한다'는 감각을 요즘 들어서야 겨우 느끼고 있다. 청소년기에 공부만 하다가 부모의 그늘에서 지리적으로 벗어난 지금, 나는 나를 매우 열심히 찾고 있고, 재작년 즈음의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생각과 행동들을 하고 있다. 
나는 가치관이 내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신념이 가치를 결정한다'고 밀한다. 가치의 우선순위는 내가 무엇이 더 가치있다고 '믿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내 신념 체계에 대해 재고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을 소개하면서 마치겠다.
>교향곡은 마지막 음을 향해 흘러가지만 그 마지막 음이 교향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목적도 어떤 편치 않는 완벽한 존재 방식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흥미롭고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현재의 사건에 의식적이고 명료하게 집중하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책은 신화를 의미 차원에서 해석하는 내용이 주로 담겨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내용은 별로 안 나와서 좀 아쉬웠는데, 그런 아쉬움을 단방에 날려주는 한 문단이었다. 

이 책에 담긴 좋은 내용은 무지무지 많고, 특히 반복되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일수록 읽어가면서 육성으로 감탄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거나 배경 지식이 없어 대충 읽고 넘어간 부분도 많겠지만, 맥락만 이해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정말 무조건 읽길 강추한다. 젊은 나이에 이 책을 접할 수 있어 감사할 정도다. 내 인생을 뒤바꾼 정도는 아니지만, 앞으로 깊은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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