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러블> 후기
사실 후기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완독 후기는 아니고 1장도 채 다 못 읽고 쓰는 후기다. 언젠가 완독하고 다시 후기를 남기러 오겠다. 너무 어렵다...
이 책은 '젠더'라는 개념이 어떤 정치적 규제 안에 있었으며, 남근로고스주의와 이성애적 기반 위의 의견들을 해체하는 중에 '젠더'가 어떠한 트러블을 일으키는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다 안 읽어서 잘 모르지만 일단 그런 것 같다.
주로 보부아르, 이리가레, 비티그를 인용하며, 이들의 주장에 있는 전제를 반박하고 더 발전된 논리를 펼치고자 한다. 기존 철학에도 배경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인용 내용들이 특히나 읽기 어려웠다.
1장은 '성별/젠더/욕망의 주체'가 제목이다. 버틀러는 '젠더'가 행위이지만 행위에 항상 수반될거라 여겨지는 행위자는 허구라고 말한다.
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들'
'여성'이라는 주체가 그 어디에서도 가정되지 않을 때에만 '재현'이 페미니즘에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성'이라는 주체를 일관되고 안정된 주체로 정의한다면, 그것이 젠더를 규제할 것이고 이는 페미니즘의 목적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그 안에서 작용하는 재현 담론의 규제 때문에 훼손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현된다는 것은 재현의 주체와 반복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표현되는 언어와 사법에 의해 영역이 제한됨으로써 의미가 훼손되는 것이다.
성별/젠더/욕망의 강제적 질서
성별을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로 지정된 문화적 구성 장치의 효과이다.
버틀러는 통념과 달리 오히려 성별이 젠더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성별(sex)은 생물학적 성, 젠더(gender)는 사회적 성으로 구분되지만, 둘 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성애적/이원론적 기반에 있다. 즉, 애초에 둘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젠더는 성별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문화적 수단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의 회색 지대에 있는 사람들로 인해, 젠더가 없이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젠더-당대 논쟁에서 순환하는 잔존물
남성주의적이고 남근로고스중심적인 언어에서 여성은 재현 불가능성을 구성한다.
즉, "일의적 의미에 기대는 언어에서 여성의 성은 규정 불가능과 지칭 불가능성을 구성한다". 여성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성이라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인용한다. 남성을 보편성으로 규정하는 언어 체계 안에서 여성은 복수의 여집합 원소에 해당한다.
남성적 담론에 의해 규제받지 않는 젠더를 정의하기 위해, 버틀러는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친다.
변화하는 맥락적 현상으로서 젠더는 실체가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특정한 관계들의 상대적 수렴점을 나타낸다.
남근로고스중심주의는 여성들에게 타자성이나 차이를 주는 자기제한적인 언어의 제스처를 취하는 대신, 여성적인 것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그 자리를 차지할 이름을 제시한다.
이원론의 한계는 어느 한쪽이 헤게모니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의미는 확장되고 반대쪽(피지배자)을 자신들이 규정함으로써 폭력을 행사한다.
이분법, 일원론, 그 너머를 이론화하기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 어떤 주어진 시간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 없는 복잡성이다. 따라서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젠더는 정의상의 완결이라는 규범적 목적에 복종하지 않고,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하는 열린 아상블라주가 될 것이다.
젠더를 이렇게 유동적으로 정의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혐오 사회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규정하는 폭력 속에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체성, 성별, 실체의 형이상학
'그 사람'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사람됨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특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초월해서 생각하는 게 가능한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을 피상적으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이 나의 예측 범위에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참 한 길 사람 속을 알기 어렵다.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니며, 이분법적 대립 경제에서 오는 차이이자, 남성성을 자기독백적인 산물로 만들려는 책략이다.
내가 남성이었다면 이런 철학을 펼치는 진영 쪽에 속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나는 그냥 현대 여성으로 태어났을 뿐이고, 어쩌다보니 남성들의 헤게모니에 잘 학습된 한 개체일 뿐인데 페미니즘의 수혜를 받고 있는 것 같단 말이다. 그게 현대 남성들의 실책이 아닐 뿐더러, 페미니즘이 이렇게 세계적으로 부상하고, 남성들은 마치 '남성'이라는 전범 국가에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성별, 젠더, 욕망의 형이상학적 통일성은 반대 젠더에 대한 차별화된 욕망 속에서, 즉 대립적 이성애의 형식 속에서 진정으로 알게 되고 표현된다고 여겨진다.
젠더의 표현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다. 그 정체성은 결과라고 말해지는 '표현' 때문에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자연적으로 명백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에 그것이 항진명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 권력, 전치의 전략
비티그의 주장으로 볼 때 '성별'이라는 언어적 허구는 이성애 욕망의 축을 따라 정체성의 생산을 규제하려고 노력하면서 강제적 이성애 체계가 생산하고 순환시키는 범주이다.